내셔널 갤러리 조각 조각 분석 투어 1탄
신교권인 독일 아우크스부르크에서 태어나 바젤에서 종교화가로 활동하던 한스 홀바인(Hans Holbein, 1497~1543)은 신구교간의 갈등으로 성상파괴 운동 등의 신구간의 갈등이 심해지자 당시 토마스무어 (유토피아 저자)의 초대로 먼저 가있던 에라스무스 (아래 한스 홀바인의 에라스무스 초상화)의 부름을 받고 영국으로 건너가 그곳에서 헨리 8세의 궁정화가로 활동하다가 사망했다.

네덜란드 태생의 로마 가톨릭교회 성직자이자 인문주의자이다.
위의 그림을 그릴때 한스홀바인은 따뜻한 모피옷을 입고있지만 많은 책집필을 통해 언제나 게으르지 않고 시대를 통찰하는 신학과 인문학자로써 최선을 다하고있는 모습을 먹물이 묻어있는 양손을 통해 섬세하게 표현을 한게 보입니다. 그리고 허리 정가운데 묶어 있는 십자가 매듭은 그림 왼편의 구교를 상징하는 화려한 고린티아 문향의 기둥과 오른편에 커튼뒤 신교를 상징하는 초라하게 보이는 성경책들과 빈 병,인문서적들의 그림으로 신구교에 대한 균형을 잃지 않는 중간자적인 당시 에라스무스의 신학과 상황을 그대로 한스 홀바인은 그림에 담고있다고 봅니다.
이렇게 영국에 오게된 한스 홀바인은 영국의 헨리8세의 후원으로 궁정화가로 지내게 되지만 얼마 지내지 않아 헨리8세는 형수이자 첫번째 부인 아라곤의 캐서린의 하녀인 엔블린이라는 여성을 만나 사랑에 빠지자 왕비인 아라곤의 캐서린과 이혼하려고 주교였던 토마스 울지경을 이혼대사로 교황청에 보냅니다. 하지만 결국 이혼승낙을 못받아 카톨릭의 자산 (결국은 토마스울지의 자산)을 모두 몰수해 버리고 이혼하고 지금의 영국국교인 성공회로 바꿔버리죠. 이때 토마스무어가 이혼에 반대한다는 이유로 런던탑에 가두면서 한스홀바인을 불렸던 에라스무스로 고향인 네덜란드로 돌아가 버립니다. 이 무시무시한 상황에 한스 홀바인은 갑자기 자신을 불러주고 아껴주었던 토마스 무어와 에라스 무스까지 없어지자 헨리 8세의 비위를 살피며 지내던 중 당시 교황청의 장자라고 일컫는 프랑스에서는 정치적으로 이혼을 재고해 달라고 (당시 잉글랜드가 교황청과의 갈등이 커지면 프랑스가 힘정치적으로 힘들어짐) 드 댕트빌이라는 정치적대사와 카톨릭 교황청에서 보내는 드셀브 대주교를 교황청대사로 보낸다. 그래서 이그림의 제목은 "대사들"인것이다. 이 그림은 정치적인 대사 드댕트빌이 당시 자신의 프랑스에 있는 캐슬 내부구조를 한스홀바인에게 설명해 주고서 어디에 그림을 부착할지까지 정확하게 알려주고 거액의 후원을 주고서 부탁한 그림이다. 한스 홀바인은 그러한 그림의 부착위치까지 계산하고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고 하니 당시 화가로써 얼마나 치밀한 계산과 천재성을 이 한폭의 그림에 수많은 아직까지도 의견이 분분한 비밀이 숨겨 있어 아마 이것까지도 염두해 두지 않았나 싶다. 지금부터는 이 그림을 조각조각 나누어서 왜 이것을 굳이 그렸을까라는 숨은 의미를 찾아 가 보기로 합니다. 물론 이 모든 과정 또한 의견이 분분할수 있으나 다분히 블로그 운영자로서 또 내셔널갤러리를 수없이 많이 (지금도 가서 보고 또 봅니다)보고 사진찍어서 분석하는 입장으로 주관적인 의미해석이니 추가해주시거나 가르쳐 주시면 기꺼이 수정하고 보완 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럼 이제부터 한스홀바인의 "대사들"에 대한 그림 탐구를 2탄을 통해 시작하도록 하겠습니다.

목판에 유채 / 207×209cm / 1533년 제작 / 내셔널 갤러리 4실